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앙투아네트(베르사이유의 장미) (문단 편집) == 평가 ==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시의 감동을 잊지 않았다면 그녀는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 거다.''' >---- >원작 1권 中 왕세손비 시절 처음 파리에 방문했을 때 자신에게 환호를 보내는 프랑스 시민들에게 감동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에 달린 각주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회전시키려 하는 자는 반드시 멸망한다는 진리를 앙투아네트는 끝내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원작 7권 中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궁전 습격이 일단락되고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끌려가 튈르리 궁에 유폐된 후에도 여전히 철지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혁명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에 달린 각주 >'''물론 우리에게도 아들이 있었죠. 우리가 아들에게 먹일 우유도 없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때... 당신은 호화로운 궁전에서 보석을 몸에 걸친 채 웃고 있었죠.''' >---- >원작 8권 中 아들 [[루이 17세|루이 샤를]]을 강제로 데려가려고 하자 당신들도 부모가 아니냐고 절규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혁명군이 한 대사 본인이 한 짓에 비해 지나치게 가혹한 최후를 맞이했고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이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등의 장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면모로 해결하기엔 당시 프랑스의 문제는 너무나 심각했고 시대가 원한 것도 전형적인 왕정 시대의 왕비가 아니었다는 게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있어 큰 비극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무고한 인물은 아니며 남편 [[루이 16세]]와 마찬가지로 일국의 왕비로서 책무보단[* 당장 그토록 충성을 다바쳤던 오스칼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날이 세도록 무도회나 연극에 참석하고자 수차례 파리와 베르사유를 드나들었지만, 정작 파리에서 프랑스 국민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단 한번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게다가 본인의 실책과 사치로 국가 예산이 파탄지경에 이르고 백성들은 한끼 하나 챙기지 못할 정도로 굶주리고 있었는데 국민들이 세금을 내는 것은 의무라는 내로남불적인 망언만 내뱉고 있었다.][* 결국 무능한 왕실에게 질릴대로 질린 백성들과 [[부르주아]]들부터 이에 동조하는 귀족 및 성직자들까지 가세하여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에도 정신을 차리고 위기를 타파하려고 노력하긴 커녕, 자신은 군주로서 국민을 지배할 권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으니 혁명 따윈 절대 인정치 않는다며 철지난 [[왕권신수설]]를 주장하는 시대착오적인 모습만 보였다. 급기야 본인들의 안위가 위태로워지자 [[바렌 사건|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하고]] 프랑스 혁명정부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과의 전쟁이 벌어지자 차라리 프랑스군이 져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빨리 파리로 침공해와''' 혁명따윈 박살을 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왕비로서 최악의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감정을 더 중시하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여 실책을 연달아 저지르며 한계가 뚜렷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정략결혼으로 희생당한 피해자라고 두둔할 수도 없는게 마리는 남편 [[루이 16세]]가 아내를 배려하고 한눈도 팔지않는 남자여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무엇보다 체면 때문에 페르젠과의 사랑을 포기한 부분만 제외하면 작중 내내 프랑스의 왕비로서 피해는 커녕 온갖 특혜란 특혜[* 실제로 마리의 사치 비용과 노름빚은 모두 마리의 개인재산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의 세금으로 지출되었다. 게다가 [[마리아 크리스티나(테셴)|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제외한 나머지 자매들은 중소 왕국 내지 공국으로 시집가거나 수녀가 된 것에 반해 마리가 시집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유럽대륙을 양분했던 강국이며 적국인 오스트리아도 프랑스 문화를 모방할 정도로 문화 강국이기도 했다.]는 다 누리고 다녔다. 한마디로 왕비로서의 권리와 특혜는 있는대로 다 누려놓고 그 대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는 책임지기 싫어하며 무책임하게 굴고 왕비로서도 무능한 모습만 보이다가, 남편의 처형과 자식들과의 생이별로 자신의 응보를 처절하게 돌려받자 반성은 커녕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냐고 떼를 쓰는 냉정히 말해 철부지에 내로남불이나 다름 없다.[* 당장 실제 역사에서 [[조지 6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요크 공작 부인으로 평범하게 잘 살고 있었지만, 시아주버님인 [[에드워드 8세]]의 무책임한 퇴위로 원치도 않은 왕비자리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엘리자베스는 남편 조지 6세를 내조하고 왕위에 오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대 혼란 속에서도 망명 제의를 거부하고 가족들과 영국에 남아 폭격으로 엉망이 된 런던을 시찰하고 국민들을 독려하는 등, 왕비이자 국모로서 책임(무책임하게 왕위를 내던진 에드워드 8세와 그 계기가 된 [[월리스 심프슨]]은 2차 세계대전 내내 '''나치 부역 및 반역''' 논란이 일었던 것과 대조적)을 다했다. 결국 엘리자베스 왕비와 조지 6세의 모범적인 모습은 영국 국민들이 영국 왕실을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엘리자베스 2세|그들의 딸]]을 거쳐 [[찰스 3세|외손자]]가 즉위하면서 영국 왕실은 현재까지 엘리자베스의 후손으로 번창하고 있다. 반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본인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리고 아들 [[루이 17세]]는 페르젠과의 사생아란 루머에 시달리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마리 테레즈]]도 탕플 탑에 유폐되게 하여 자식들의 인생마저 망치고 말았다.] 차라리 격동기의 [[프랑스 혁명]]의 연관자가 될 일이 아예 생기지 않게 [[루이 16세]]와 결혼하지 않고[* 물론 루이 16세와의 혼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은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하기 싫다고 안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실제 역사에서 원래 루이 16세와 혼인할 사람은 열번째 언니인 [[마리아 카롤리나]]였지만 아홉째 언니인 마리아 요제파가 사망하여 혼인 순번이 당겨지면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가게 된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공주로만 남았다면, 혹은 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나라의 왕비 혹은 적당히 고위 귀족과 결혼해 평범한 귀부인으로 살았다면 본인도 국민도 모두 행복했을 여인이었을 것이다.[* 작중에서 보다 못한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오스칼]]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걱정해 "프랑스의 왕비이자 국모로서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셨으면 합니다"라고 조언을 하나, 마리는 오스칼의 충언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 자신을 이해할 수 없냐며 반박하는 장면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정도 안타깝긴 했지만 자기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국고를 탕진하고, 그 돈이 다 어디에서 나온지 생각하면 이때부터 마리는 프랑스의 국모이자 왕비로서 완전히 실격이었다.][* 사실 왕비로 즉위한 초반부터 매번 하는 백성들의 일반 알현을 자신이 번거롭다는 이유로 없애려는 것에서 백성들의 삶에 1도 관심을 두지 않는 조짐이 보였고, 이런 마리 앙투아네트를 무책임하다고 바라보는 인식은 바로 위에 서술된 혁명군의 대사로 작중에서도 귀족이든 평민이든 별다를 바 없다는 게 드러난다. 어떻게 보면 남성으로 자라났다가 이후 페르젠에 대한 연심과 여성으로서 행복을 포기한 것, 더 나아가 자신이 지금까지 누려온 특권에 고민하다가 성별을 넘어 주체적인 한 사람으로서 살겠다고 결심하며 귀족 신분을 버리고 혁명에 투신하여 조국과 백성을 지키고자 노력한 오스칼과 대조적인 인간상.] 결론적으로 '''개인적으로는 착하고 순진해도 정치적인 자리에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한 사람이 민중과 정치판의 심정과 동향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으면 무슨 꼴이 나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